나는 국밥을 좋아한다
국밥 한 그릇 할래요?
라는 짧은 음절 속에는 묘한 안도감이 스며들어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느슨하게 한다. 과장 없이 담백함이 좋고, 시끄럽지 않게 곁을 지켜주는 듯한 침묵이 좋아서, 나는 그 말이 좋다.
국밥 한 그릇, 그 묵직한 온기 속에는 쉬이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안에는 위로의 김, 견뎌낸 시간의 깊은 맛, 그리고 굳건한 침묵이 담겨 있다.
토렴이라는 조리법, 반복의 미학
국밥에는 끓는 국물을 밥 위에 천천히, 몇 번이고 부었다 따라내는 '토렴'이라는 정성스러운 과정이 깃들어 있다. 그 조용한 반복 속에서 밥알은 뜨거운 국물의 온기를 속속들이 받아들인다. 이는 밥알이 퍼석거리지 않도록 한 알 한 알 섬세하게 열기를 입히는 과정이다. 국물과 밥이 마침내 하나의 온도로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텅 비었던 마음에 따뜻한 물이 천천히 차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제야, 마음이 녹는다.

삶 또한 그 묵묵한 토렴 과정과 닮아 있다. 문득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끓는점에 도달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예고 없이 찾아드는 고통, 마음 깊숙이 솟구쳐 오르는 절망, 이별의 싸늘함, 뼈아린 실패, 풀리지 않는 오해, 미래를 향한 불안 등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끓는점에 도달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존재를 뜨겁게 달구지만, 때로는 그 열기에 속절없이 소진시키기도 한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뒷걸음치기도 하지만, 결국 그 뜨거운 순간들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나아간다. 아픔은 깊은 흉터를 남기지만, 동시에 살아있음의 뚜렷한 증거가 된다.
적절한 온도를 만드는 순간들
어떤 날들은 차가운 밥처럼 딱딱하고 생기 없는 순간들이 반복되기도 한다. 외부의 자극조차 닿지 않는 무기력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점점 얼어붙는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조용히 끓고 있는 국물처럼, 우리를 다시 데워줄 뜨거운 순간을 품고 있다. 예상치 못한 말 한마디, 가슴을 울리는 음악, 영화 속 한 장면, 거리에서 마주친 계절의 변화 같은 작은 자극들이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그런 뜨거운 찰나들이 차가운 현실과 부딪히며, 적절한 삶의 온도를 만들어낸다. 토렴처럼 반복되는 자극과 반응, 식고 데워지기를 반복하며 우리는 점점 더 우리답게 익어간다. 격렬한 드라마보다, 잔잔한 온도 조절이 우리 삶의 깊이를 완성해 간다.
천천히 우러나는 인생의 맛 토렴에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성급하게 국물을 부으면 밥알은 제 형태를 잃고 뭉개지지만, 충분한 시간을 들여 반복하면 깊은 맛이 우러나온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단 한 번의 강렬한 경험으로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사랑과 상실의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간다. 우리는 그 격랑 속에서 흔들리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만의 중심을 붙잡는 법을 배운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성숙해진다. 삶은 요란한 변화보다는, 조용하고 깊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비로소 그 진정한 풍미를 드러낸다.
정성껏 토렴 된 국밥은 그 깊이가 다르다. 밥알과 국물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하나로 융화된다. 한 숟가락 가득 떠먹었을 때, 그 안에는 분리될 수 없는 조화로운 맛이 깃들어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숱한 실패와 고통의 쓴맛, 희미한 기쁨의 단맛, 그리고 감사와 연대의 따뜻함이 뒤섞여, 우리만의 독특한 맛을 만들어낸다. 뜨겁지만 속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짭짤하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는 그런 맛. 오랜 풍상을 겪어낸 사람에게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깊은 맛이 느껴진다. 삶의 모진 풍파 속에서 길어 올린,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맛을 그들은 알고 있다.
삶을 토렴 하듯 살아가기 인생은 따뜻한 국밥과 같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들끓어 온몸을 데기도 하고, 때로는 차갑게 식어 버려 먹기조차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토렴처럼, 인내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 우리는 자신만의 가장 편안한 온도를 찾아낼 수 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모든 혼란과 방황, 기쁨과 슬픔의 반복되는 순간들은, 바로 우리 삶이라는 국밥의 깊은 맛을 만들어가는 토렴의 과정인지 모른다. 그 지난한 시간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더 깊고 따뜻한 '나'라는 존재로 완성되어 갈 것이다.
오늘 하루도, 당신만의 뜨거운 인생 국밥을 정성껏 토렴 해보자. 너무 뜨겁다고 외면하지 말고, 너무 차갑다고 포기하지도 말고. 그저 묵묵히, 자신만의 속도로 온기를 더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마주하자. 아무 말 없이 국물 한 숟갈을 떠올릴 때, 그 안에서 문득 살아가는 맛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거면 됐다.😊
난 오늘도 국밥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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